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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대학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학

중세 대학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경향과 신학 등장.

 

중세 대학과 신학

중세에 등장한 과학과 신학

중세 초기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수도원 학교나 비전문적인 학자에 의해 진행되었던 교육의 수준 역시 그다지 높지 않았다. 500년 이후 유럽 전역에 퍼진 수도원 학교는 가톨릭 사제들에게 최소한의 교육만을 제공할 뿐이었다. 이곳에서 지식의 역할은 미미한 정도였고 교육 내용 역시 기초적인 라틴어와 신학에 국한되었다. 이처럼 중세 초기의 지식은 별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없었지만, 12세기를 전후한 무렵부터 시작된 번역 활동을 통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스페인의 톨레도가 1085년 기독교도에게 점령되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번역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된 서적들은 번역 활동을 통해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과거 그리스의 성과를 포함하는 이슬람 과학의 성과들이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번역 활동에서 크레모나의 제라르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1145년경 프톨레마이오싀의 '알마게스트'를 찾아 톨레도를 방문했다가 그곳에 정착한 제라르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릭학', '천체에 관하여', '발생과 부패에 관하여'를 비롯하여 예우쿨레이데스의 '원론', 아비케나의 '의학정전' 등 그리스와 이슬람의 과학적 성과 70-80종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진행된 당시의 번역활동에서 다음의 두가지 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반드시 번역할 만한 중요한 문헌 가운데 일부가 전혀 번역되지 않았거나 또는 번역이 되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아폴로니우스의 저서는 이때 번역조차 되지 않았고, 아르키메데스의 저서는 번역만 되었을 뿐 제대로 이해되지도 못했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또한 이중번역의 문제도 중요했다. 번역을 담당했던 번역자의 과학 지식은 논외로 하더라도 번역 과정이 아랍어에서 직접 라틴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실제 번역 과정은 아럽어의 문헌이 중간에 스페인어나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를 거쳐야 했으므로, 이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당시 번역은 학문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을 통해 유럽에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새로운 지식들은 학문 세계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으며, 지식인들은 이것들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하였다. 그것이 바로 12세기 말 무렵부터 유럽 각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한 대학이다. 중세 대학은 기본적으로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동업자 조직인 길드의 체제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들이 길드를 결성한 후 선생을 고용하는 형태였고, 파리 대학은 선생들이 길드를 결성한 후 학생들을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중세 대학의 운영 방식은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모든 중세 대학은 기본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개인이나 국가의 후원에 의존하지 않았고 도시의 행정으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학위를 수여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중세 대학의 과정은 교양 학부와 전문 학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은 일단 교양 학부에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 등의 3학과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의 4과를 배웠다. 교양 학부를 마치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할 때에는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등 전문 학부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해 고급 지식을 학습할 수 있었고, 이 과정을 마치면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중세 대학에서 가르쳐졌던 지식이란 번역을 통해 당시 유럽에 소개된 바로 그 지식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체계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기독교 신학과 잘 들어맞지 않아 서로 부딪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예컨대 이성에 의해 자연을 탐구하는 철학의 영역과 신의 존재나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은 각기 고유한 영역이 있으며 이 둘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이른바 이중 진리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적 체계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조화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신학자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철학은 감각과 이성 같은 인간의 능력을 이용하여 그 나름대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며, 신학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발견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에게 신학은 완전한 것이고 철학은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는 철학이 신학의 진리를 설명해 주고 신앙에 대한 여러 의심을 물리칠 수 있는 도구로써 신학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